[12강] 이제현 - 사리화
黃雀何方來去飛 황작하방래거비 참새야 어디서 오가며 나느냐 참새는 어디서 날아왔는고 한해 농사가 아랑곳없구나 늙은 홀아비가 혼자 갈고 매었는데 벼와 수수를 다 없애다니
요점 정리
지은이 : 이제현(李齊賢)의 한역
짜임 : 기,승,전,결의 4단 구성
내용 연구 黃雀何方來去飛 황작하방래거비 참새야 어디서 오가며 나느냐
- 오가며 나는 참새(기)
雀(작)-참새,
曾(증)-거듭, 鰥(환)-홀아비, 翁(옹)-늙은이, 耕(경)-밭갈다, 耘(운)-김매다,
耗(모)-없애다. 盡(진)-다하다, 黍(서)-기장. 不曾知(부증지) : '曾(증)'은 거듭, 거듭 알지 못하고, 전혀 모른 채. 아랑곳 않는다. 권력자들이 백성의 고통을 모름 鰥翁(환옹) : 늙은 홀아비. 사궁지수(四窮之首, 사궁의 첫째), 사궁(四窮)은 환(鰥), 과(寡), 고(孤), 독(獨) 耕耘了(경운료) : 논밭을 갈고[耕], 김을 매는 것을[耘] 마치다[了]. - 농민의 고통스러운 농사 과정 耗盡(모진) : 해지거나 닳아서 다 없어짐. 禾黍(화서) : 벼와 기장(벼과의 일년생 작물, 좁쌀보다 낱알이 굵음) 참새 : 권력자. 평민을 수탈하는 권력층을 비유, 탐관오리, 관련 한자 성어는 苛斂誅求(가렴주구)
일 년 농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 참새(권력자,
수탈자)는 농사의 어려움을 알 리 없다. 자신의 배만 부르면 그만이다.
농민이 고통을 감수하며 지은 농사를 참새는 쉽게도 먹어 버린다. 다시
말해서 수탈자는 농민의 농사의 고통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늙은 홀아비 홀로 갈고 맸는데
: 늙은 홀아비는 고통스럽고, 힘 없는 농민의 참상을 상징 이해와 감상 고려시대에 지어진 작자 미상의 가요. 본래의 가사는 전하지 않고, 다만 이제현(李齊賢)의 ≪익재난고 益齋亂藁≫소악부(小樂府)와 ≪고려사≫ 악지(樂志)에 노래의 내력과 이제현의 한역시가 수록되어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이제현은 소악부(小樂府) 11편을 남겼는데, 「사리화」는 그 중 네 번째 시이다. 소악부란 당시 유행하던 우리말 노래(민요 등)를 한시로 옮겨 놓은 것인데, 이 가운데는 「처용가」·「정석가」·「쌍화점」·「정과정」등의 고려 속요도 실려 있다. ≪고려사≫ 악지에 의하면, 부세(賦稅)는 무겁고 권력자들은 수탈하므로 백성들이 참새가 곡식을 쪼아먹는 것에 탁의(託意)하여 이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칠언 절구(七言絶句)로 된 「사리화」는 세금이 무겁고 권력 있는 자들의 수탈이 심한 것을 곡식을 쪼아 먹는 참새에 비유하여 원망한 노래이다. 이제현의 한역시에도 당시 농민들의 궁핍한 생활과 관리들의 타락된 일면이 잘 풍자되어 있다. 그리고 사리화는 기장과 비슷한 풀을 말하는 것 같다는 해석이 있기는 하나, 확실히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사리라는 꽃이 있는데 기장과 비슷하다고 하는데 그것과 유추해서 해석을 해야 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여간 무리하게 한자의 뜻으로 해석을 하자면, 사리화의 沙(사)에는 목이 쉰다는 뜻이 들어 있고, 里(리)에는 근심하다는 뜻이 있다. 시경 云如何里에서 그 의미를 추측할 수가 있다. 그래서 사리화는 농부들이 목이 쉬고, 근심 걱정하여 얻는 꽃 다시 말해서 곡식이라는 뜻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해와 감상1 고려시대에 지어진 작자 미상의 가요. 본래의 가사는 전하지 않고, 다만 이제현(李齊賢)의 ≪익재난고 益齋亂藁≫소악부(小樂府)와 ≪고려사≫ 악지(樂志)에 노래의 내력과 이제현의 한역시가 수록되어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고려사≫ 악지에 의하면, 부세(賦稅)는 무겁고 권력자들은 수탈하므로 백성들이 참새가 곡식을 쪼아먹는 것에 탁의(託意)하여 이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이제현의 한역시에도 당시 농민들의 궁핍한 생활과 관리들의 타락된 일면이 잘 풍자되어 있다. 한역시는 다음과 같다. 참새는 어디서 날아왔는고
심화 자료
이제현 1287(충렬왕 14)∼1367(공민왕 16). 고려 후기의 학자·정치가.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지공(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역옹(饑翁). 고려 건국 초의 삼한공신(三韓功臣) 금서(金書)의 후예이지만, 아버지 진(山)이 과거를 통해 크게 출세함으로써 가문이 비로소 떨치기 시작했는데, 진은
검교시중(檢校侍中)에까지 올랐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숙성해, 글을 짓는
데 이미 작자기(作者氣)를 지니고 있었다. 1301년(충렬왕 27) 성균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이어서 과거에 합격하였다. 이 해에 당시
대학자이자 권세가였던 권보(權溥)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1303년 권무봉선고판관(權務奉先庫判官)과
연경궁녹사(延慶宮錄事)를 거쳐 1308년 예문춘추관에 선발되고 다음해에 사헌규정(司憲糾正)에 발탁됨으로써 본격적인 관리생활을 시작하였다.
정치가로서의
그는 당시 고려가 원의 부마국(駙馬國)이라는 현실을 시인하고, 그 테두리 안에서 국가의 존립과 사회모순의 광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급격한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으면서 온건한 태도로 현실에 임하였다. 당시 복잡한 정치상황 아래에서 원과 고려를 넘나들면서 활약해 최고의 지위에 오르지만,
화를 당하거나 유배된 적이 없었다. 그의 저술로 현존하는 것은 ≪익재난고 益齋亂藁≫ 10권과 ≪역옹패설≫ 2권이다.
흔히 이것을 합해 ≪익재집≫이라 한다. 그는 이색이 그 묘지명에서
“도덕의 으뜸이요, 문학의 종장이다(道德之首 文章之宗).”라고
말한 바와 같이 후세에 커다란 추앙을 받았고, 경주의 구강서원(龜岡書院)과 금천(金川)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익재난고 고려 말의 문신 학자인 이제현(李齊賢:1287~1367)의 시문집으로 목판본. 10권 4책. 저자가 살아 있을 때인 1363년(공민왕 12) 아들 창로(彰路) 및 손자 보림(寶林)이 엮어 간행하였고, 1600년(선조 33) 후손 시발(時發)이 중간(重刊)하였으며, 1793년(숙종 19) 경주부(慶州府)에서 3간하였다. 권1∼4에는 시(詩), 권5∼8에는 문(文), 권9에는 고려의 왕들에 대한 사찬(史贊)과 주요 기사가 들어 있고, 권10에는 습유(拾遺)·묘지(墓誌)·연보(年譜) 등을 수록하였으며, 책머리에 저자의 화상도(畵像圖)와 시발의 제어(題語) 및 이색(李穡)의 초판서(初板序)가 있다. 특히 권4에 있는 <소악부(小樂府)>는 고려의 속요(俗謠)를 한시(漢詩)로 옮긴 것으로, 국문학상의 귀중한 자료이다. 대동문화연구소에서 발행한 《여계명현집(麗季名賢集)》에 들어 있다. (동아대백과사전)
소악부 조선 헌종 때 자하 신위의 한역가로 이제현의 《익재소악부》를 본떠서 조선시대의 시조(時調) 40수를 뽑아 한시(漢詩)로 번역한 것이다. 신위의 한시를 모은 《경수당전고(警修堂全藁)》에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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