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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2.29 [12강] 이제현 - 사리화

 

사리화(沙里花)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黃雀何方來去飛  황작하방래거비
一年農事不曾知  일년농사부증지
鰥翁獨自耕耘了  환옹독자경운료
耗盡田中禾黍爲  모진전중화서위

참새야 어디서 오가며 나느냐
일 년 농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늙은 홀아비 홀로 갈고 맸는데 
밭의 벼며 기장을 다 없애다니.
 

참새는 어디서 날아왔는고

한해 농사가 아랑곳없구나

늙은 홀아비가 혼자 갈고 매었는데

벼와 수수를 다 없애다니

dia_bluve.gif 요점 정리

 

circle01_blue.gif 지은이 : 이제현(李齊賢)의 한역
circle01_blue.gif 갈래 : 칠언절구(七言絶句)
circle01_blue.gif 연대 : 고려말
circle01_blue.gif 성격 : 현실 고발적, 풍자적, 상징적, 비판적
circle01_blue.gif 표현 : 상징법(참새 - 수탈자, 관리. 홀아비 - 농민, 힘없는 백성)
circle01_blue.gif 압운 : 飛(비) ,知(지), 爲(위)
circle01_blue.gif 어조 : 부당한 현실을 비유적으로 고발하며 원망하는 어조
circle01_blue.gif 의의 : 당시 민족적 현실을 노래한 한시

circle01_blue.gif 짜임 : 기,승,전,결의 4단 구성
circle01_blue.gif 주제 : 권력자들의 농민 수탈에 대한 비판과 고발, 가혹한 수탈로 인한 농민의 피폐한 삶.
circle01_blue.gif 출처 : 익재난고(益齋亂藁) 

 

dia_bluve.gif 내용 연구

黃雀何方來去飛  황작하방래거비
一年農事不曾知  일년농사부증지
鰥翁獨自耕耘了  환옹독자경운료
耗盡田中禾黍爲  모진전중화서위

참새야 어디서 오가며 나느냐 - 오가며 나는 참새(기)
일 년 농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 농사에 아랑곳 않는 참새(승)
늙은 홀아비 홀로 갈고 맸는데 
- 늙은 홀아비가 가꾼 곡식(전)
밭의 벼며 기장을 다 없애다니.
- 참새에 대한 원망(결)

 

雀(작)-참새, 曾(증)-거듭, 鰥(환)-홀아비, 翁(옹)-늙은이, 耕(경)-밭갈다, 耘(운)-김매다, 耗(모)-없애다. 盡(진)-다하다, 黍(서)-기장.
黃雀(황작) :
참새, 꾀꼬리. 여기서는 '참새'의 뜻으로 '평민을 수탈하는 권력층'을 비유함

不曾知(부증지) : '曾(증)'은 거듭, 거듭 알지 못하고, 전혀 모른 채. 아랑곳 않는다. 권력자들이 백성의 고통을 모름

鰥翁(환옹) : 늙은 홀아비. 사궁지수(四窮之首, 사궁의 첫째), 사궁(四窮)은 환(鰥), 과(寡), 고(孤), 독(獨)

耕耘了(경운료) : 논밭을 갈고[耕], 김을 매는 것을[耘] 마치다[了]. - 농민의  고통스러운 농사 과정

耗盡(모진) : 해지거나 닳아서 다 없어짐.

禾黍(화서) : 벼와 기장(벼과의 일년생 작물, 좁쌀보다 낱알이 굵음) 

참새 : 권력자. 평민을 수탈하는 권력층을 비유, 탐관오리, 관련 한자 성어는 苛斂誅求(가렴주구)

일 년 농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 참새(권력자, 수탈자)는 농사의 어려움을 알 리 없다. 자신의 배만 부르면 그만이다. 농민이 고통을 감수하며 지은 농사를 참새는 쉽게도 먹어 버린다. 다시 말해서 수탈자는 농민의 농사의 고통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늙은 홀아비 :
백성, 과중한 세금에 시달리는 농민
사궁(四窮) :
네 가지의 궁한 처지라는 뜻으로, 늙은 홀아비와 늙은 홀어미, 부모 없는 어린이, 자식 없는 늙은이를 통틀어 이르는 말. 환과고독.
경운 :
논밭을 갈고 김매는 것

늙은 홀아비 홀로 갈고 맸는데 : 늙은 홀아비는 고통스럽고, 힘 없는 농민의 참상을 상징
기장 :
벼과의 일년생 작물, 좁쌀보다 낟알이 굵음 - 일년 동안에 지은 농민의 피땀어린 결과
밭의 벼며 기장을 다 없애다니 : 참새가 벼나 기장을 구분하여 먹을 리 없다. 자신의 배를 불릴 수 있는 것이라면, 종류를 불문할 것이다. 수탈자(권력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고통이나 곡식의 종류도 아랑곳하지 않고 되도록 많은 양의 곡식을 착취하게 되는 것이다. 

dia_bluve.gif 이해와 감상

 고려시대에 지어진 작자 미상의 가요. 본래의 가사는 전하지 않고, 다만 이제현(李齊賢)의 ≪익재난고 益齋亂藁≫소악부(小樂府)와 ≪고려사≫ 악지(樂志)에 노래의 내력과 이제현의 한역시가 수록되어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이제현은 소악부(小樂府) 11편을 남겼는데, 「사리화」는 그 중 네 번째 시이다. 소악부란 당시 유행하던 우리말 노래(민요 등)를 한시로 옮겨 놓은 것인데, 이 가운데는 「처용가」·「정석가」·「쌍화점」·「정과정」등의 고려 속요도 실려 있다.

 ≪고려사≫ 악지에 의하면, 부세(賦稅)는 무겁고 권력자들은 수탈하므로 백성들이 참새가 곡식을 쪼아먹는 것에 탁의(託意)하여 이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칠언 절구(七言絶句)로 된 「사리화」는 세금이 무겁고 권력 있는 자들의 수탈이 심한 것을 곡식을 쪼아 먹는 참새에 비유하여 원망한 노래이다. 이제현의 한역시에도 당시 농민들의 궁핍한 생활과 관리들의 타락된 일면이 잘 풍자되어 있다.

 그리고 사리화는 기장과 비슷한 풀을 말하는 것 같다는 해석이 있기는 하나, 확실히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사리라는 꽃이 있는데 기장과 비슷하다고 하는데 그것과 유추해서 해석을 해야 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여간 무리하게 한자의 뜻으로 해석을 하자면, 사리화의 沙(사)에는 목이 쉰다는 뜻이 들어 있고, 里(리)에는 근심하다는 뜻이 있다. 시경 云如何里에서 그 의미를 추측할 수가 있다. 그래서 사리화는 농부들이 목이 쉬고, 근심 걱정하여 얻는 꽃 다시 말해서 곡식이라는 뜻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해와 감상1

 고려시대에 지어진 작자 미상의 가요. 본래의 가사는 전하지 않고, 다만 이제현(李齊賢)의 익재난고 益齋亂藁소악부(小樂府)와 고려사 악지(樂志)에 노래의 내력과 이제현의 한역시가 수록되어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고려사 악지에 의하면, 부세(賦稅)는 무겁고 권력자들은 수탈하므로 백성들이 참새가 곡식을 쪼아먹는 것에 탁의(託意)하여 이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이제현의 한역시에도 당시 농민들의 궁핍한 생활과 관리들의 타락된 일면이 잘 풍자되어 있다. 한역시는 다음과 같다.

참새는 어디서 날아왔는고
한해 농사가 아랑곳없구나
늙은 홀아비가 혼자 갈고 매었는데
벼와 수수를 다 없애다니
(黃雀何方來去飛 一年農事不曾知
鰥翁獨自耕芸了 耗盡田中禾黍爲)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dia_bluve.gif 심화 자료

circle01_blue.gif 이제현

1287(충렬왕 14)1367(공민왕 16). 고려 후기의 학자·정치가.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지공(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역옹(翁). 고려 건국 초의 삼한공신(三韓功臣) 금서(金書)의 후예이지만, 아버지 진()이 과거를 통해 크게 출세함으로써 가문이 비로소 떨치기 시작했는데, 진은 검교시중(檢校侍中)에까지 올랐다.

[생애]

어려서부터 남달리 숙성해, 글을 짓는 데 이미 작자기(作者氣)를 지니고 있었다. 1301년(충렬왕 27) 성균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이어서 과거에 합격하였다. 이 해에 당시 대학자이자 권세가였던 권보(權溥)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1303년 권무봉선고판관(權務奉先庫判官)과 연경궁녹사(延慶宮錄事)를 거쳐 1308년 예문춘추관에 선발되고 다음해에 사헌규정(司憲糾正)에 발탁됨으로써 본격적인 관리생활을 시작하였다.
1311년(충선왕 3)에는 전교시승(典校寺丞)과 삼사판관(三司判官)에 나아가고, 다음해에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에 선발되었다. 1314년(충숙왕 1) 상왕인 충선왕의 부름을 받아 원나라의 수도 연경(燕京)으로 가서
만권당(萬卷堂)에 머물게 됨으로써 그의 재원(在元) 생애가 시작되었다.
 충선왕은 왕위에서 물러난 다음 원나라에 있으면서 만권당을 짓고
서사(書史)를 즐기며, 원나라의 유명한 학자·문인들을 드나들게 했는데, 그들과 상대할 고려측의 인물로서 이제현을 지명했던 것이다. 이로부터 그는 만권당에 출입한 요수(姚燧)·염복(閻復)·원명선(元明善)·조맹부(趙孟) 등 한족(漢族) 출신 문인들과 접촉을 자주 갖고 학문과 식견을 넓힐 수 있었다.
그의 재원 생애와 관련해 특기할 것은 세 번에 걸쳐 중국 내륙까지 먼 여행을 했다는 사실이다. 1316년에는 충선왕을 대신해 서촉(西蜀)의 명산 아미산(峨眉山)에 치제(致祭)하기 위해 3개월 동안 그곳을 다녀왔다. 1319년에는 충선왕이 절강(浙江)의 보타사(寶陀寺)에 강향(降香)하기 위해 행차하는 데 시종하였다. 마지막으로 1323년(충숙왕 10)에는 유배된 충선왕을 만나 위로하기 위해 감숙성(甘肅省)의 타사마(朶思麻)에 다녀왔다. 이 세 번에 걸친 여행은 그의 견문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320년(충숙왕 7)은 그의 생애를 통해 또 하나의 분기점을 이룬다. 주로 만권당에 머물며 활동하는 동안에도 때때로 고려에 와서 관리로 복무해, 성균좨주(成均祭酒)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선부전서(選部典書)를 역임하였다.
 이 해에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면서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의 호를 받았고,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재하였다. 그런데, 겨울에 충선왕이 참소를 받아 유배됨으로써 자연히 그의 재원 생애도 6년 만에 끝나게 되었다.
충선왕의 유배로 인한 정세변화는 고려의 정치상황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뒤이어 고려의 국가적 독립성을 말살시키고 원나라의 내지와 같은 성(省)을 세울 것을 주장하는
입성책동(立省策動)이 강력하게 일어났다. 또한 충숙왕을 내몰고 왕위를 차지하려는 심왕 고(瀋王暠)와 그 일파의 준동이 격화되었다.
 그는 1321년 아버지의 상을 치른 다음 1323년 원에 들어가 입성반대상서를 올렸는데, 그 내용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이어서 토번(吐蕃)으로 유배되어 있는 충선왕의 방환운동도 벌였다. 오래지 않아 입성책동이 저지되고 충선왕이 타사마로 이배된 데에는 그가 벌인 활동의 영향이 적지 않았으리라 여겨지고 있다. 1324년 밀직사를 거쳐 1325년 첨의평리(僉議評理)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전임됨으로써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그 뒤 충숙왕과 충혜왕 부자가 중조(重祚)하는 어지러운 때를 당해 그의 활동은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1339년 조적(曹
使)의 난이 일어난 끝에 충혜왕이 원나라에 붙잡혀가자 그를 좇아 원나라에 가서 사태를 수습해 왕이 복위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수년간 조적의 여당(餘黨)에 눌려 두문불출했는데, 그 동안 역옹패설 翁稗說을 저술하였다.
그가 다시 정치의 표면에 나타나 중요한 구실을 하는 것은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한 직후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임명되면서부터이다. 이때 문란해진 정치기강을 바로잡고 새로운 시책을 펴는 데 참여해 여러 항목에 걸친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1348년 충목왕이 죽자 원에 가서 왕기(王祺 : 뒤의 공민왕)를 왕에 추대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으나 실패하였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해 새로운 개혁정치를 추진하려 할 때 정승에 임명되어 국정을 총괄하였다. 이때부터 네 번에 걸쳐 수상이 되는 기록을 세웠다. 1353년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으로서 두 번째로 지공거가 되어
이색(李穡) 등 35인을 등과자(登科者)로 선발하였다. 1356년(공민왕 5) 기철(奇轍) 등을 죽이는 반원운동이 일어나자, 문하시중이 되어 사태의 수습에 나섰다가 다음해에 치사하고 관직에서 아주 물러났다.
 그 뒤에도 국가의 중대사에 대해서는 자문에 응했으며, 홍건적이 침입해 개경이 함락되었을 때에는 남쪽으로 달려가 상주에서 왕을 배알하고 호종(扈從)하였다.


[활동]

정치가로서의 그는 당시 고려가 원의 부마국(駙馬國)이라는 현실을 시인하고, 그 테두리 안에서 국가의 존립과 사회모순의 광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급격한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으면서 온건한 태도로 현실에 임하였다. 당시 복잡한 정치상황 아래에서 원과 고려를 넘나들면서 활약해 최고의 지위에 오르지만, 화를 당하거나 유배된 적이 없었다.
학자로서의 그는 뛰어난 유학자로 성리학의 수용
·발전에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우선 그는 고려에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백이정(白正)의 제자였고 사서집주 四書集註를 간행해 성리학의 보급에 크게 노력한 권보의 문생이요 사위였다. 또한 그의 제자가 이곡(李穀)·이색의 부자였다는 학통(學統)으로 보아 그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또한, 그가 만권당에서 교유한 중국의 문인
·학자가 성리학에 깊은 조예를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점에 비추어 중국의 성리학에 직접 접하면서 그것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할 수 있었으리라고 여겨진다. 충목왕 때 개혁안을 제시하면서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정심(誠意正心)의 도를 강조한 것은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리학에만 경도되지는 않았고, 그 때문에 뒷날 성리학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문학부문에서 그는 대가를 이루었다. 많은 시문을 남겼는데, 시는 전아하고 웅혼하다는 평을 받았고, 많은 영사시(詠史詩)가 특징을 이룬다. 또한, 사(詞)의 장르에서 독보적 존재로 일컬어지고 있다. 고려의 한문학을 세련시키면서 한 단계 높게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한국문학사를 통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한편, 빼어난 유학지식과 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사학(史學)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민지(閔漬)의 본조편년강목 本朝編年綱目을 중수(重修)하는 일을 맡았고, 충렬왕·충선왕·충숙왕의 실록을 편찬하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특히, 만년에 국사 國史를 편찬했는데, 기년전지(紀年傳志)의 기전체를 계획해 백문보(白文寶)·이달충(李達衷)과 함께 일을 진행시켰으나 완성시키지 못하였다.

[저술]

그의 저술로 현존하는 것은 익재난고 益齋亂藁 10권과 역옹패설 2권이다. 흔히 이것을 합해 익재집이라 한다. 그는 이색이 그 묘지명에서 도덕의 으뜸이요, 문학의 종장이다(道德之首 文章之宗).라고 말한 바와 같이 후세에 커다란 추앙을 받았고, 경주의 구강서원(龜岡書院)과 금천(金川)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되었다.
1376년 공민왕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牧隱藁, 李益齋의 在元生涯에 대하여(金庠基, 大東文化硏究 1, 1964), 李齊賢(高柄翊, 人物韓國史 , 1965), 益齋 李齊賢의 史學에 대하여(金哲埈, 東方學志 8, 1967), 整治都監의 設置經緯(閔賢九, 國民大學論文集 11, 1977), 益齋 李齊賢의 政治活動(閔賢九, 震檀學報 51, 1981), 李齊賢의 歷史意識(鄭求福, 震檀學報 51, 1981), 益齋 小樂府와 高麗歌謠(徐首生, 東洋文化硏究 11, 1984).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circle01_blue.gif 익재난고

고려 말의 문신 학자인 이제현(李齊賢:1287~1367)의 시문집으로 목판본. 10권 4책. 저자가 살아 있을 때인 1363년(공민왕 12) 아들 창로(彰路) 및 손자 보림(寶林)이 엮어 간행하였고, 1600년(선조 33) 후손 시발(時發)이 중간(重刊)하였으며, 1793년(숙종 19) 경주부(慶州府)에서 3간하였다. 권1∼4에는 시(詩), 권5∼8에는 문(文), 권9에는 고려의 왕들에 대한 사찬(史贊)과 주요 기사가 들어 있고, 권10에는 습유(拾遺)·묘지(墓誌)·연보(年譜) 등을 수록하였으며, 책머리에 저자의 화상도(畵像圖)와 시발의 제어(題語) 및 이색(李穡)의 초판서(初板序)가 있다. 특히 권4에 있는 <소악부(小樂府)>는 고려의 속요(俗謠)를 한시(漢詩)로 옮긴 것으로, 국문학상의 귀중한 자료이다. 대동문화연구소에서 발행한 《여계명현집(麗季名賢集)》에 들어 있다. (동아대백과사전)

circle01_blue.gif 소악부

조선 헌종 때 자하 신위의 한역가로 이제현의 《익재소악부》를 본떠서 조선시대의 시조(時調) 40수를 뽑아 한시(漢詩)로 번역한 것이다. 신위의 한시를 모은 《경수당전고(警修堂全藁)》에 들어 있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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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곽성호(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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